요한 프리드리히 슈트루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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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한 프리드리히 슈트루엔제는 1737년 프로이센 왕국 할레에서 태어난 의사이자 계몽주의 사상가이다. 그는 할레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무신론을 신봉했으며, 알토나에서 의사로 활동하다 덴마크 귀족들과 교류하며 크리스티안 7세의 주치의가 되었다. 1768년 덴마크 왕실 주치의로 임명된 후 국왕의 신임을 얻어 권력을 장악, 섭정으로서 다양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덴마크의 관습을 고려하지 않은 급진적인 개혁과 왕비와의 부적절한 관계는 국민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쿠데타로 체포되어 1772년 처형되었다. 슈트루엔제는 사후에도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했으며, 그의 삶은 여러 문학 작품과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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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프리드리히 슈트루엔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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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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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의사 |
출생일 | 1737년 8월 5일 |
사망일 | 1772년 4월 28일 |
출생지 | 프로이센 왕국 할레 (잘레) |
사망지 | 덴마크-노르웨이 코펜하겐 |
경력 | |
직위 | 덴마크 추밀고문관 |
이전 | 요한 하르트비히 에른스트 폰 베른스토르프 |
이후 | 오베 회에그-굴드베르 |
가족 | |
자녀 | 루이세 아우구스타 덴마크 공주 (소문) |
기타 | |
이름 (독일어) | Johann Friedrich Struensee |
2. 생애 초반
요한 프리드리히 슈트루엔제는 1737년 8월 7일 프로이센 왕국 할레에서 태어나 성 모리츠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1] 그의 아버지는 독실한 경건주의 신학자이자 목사인 아담 슈트루엔제였고, 어머니는 마리아 도로테아 카를이었다. 그는 여섯 자녀 중 셋째였으며, 종교적 관용을 중시하는 존경받는 중산층 가문에서 성장했다. 그의 형제 중 세 아들은 모두 대학에 진학했지만 아버지처럼 신학자가 되지는 않았고, 두 딸은 목사와 결혼했다.[1]
알토나에서 약 10년 동안 의사로 근무하면서, 요한 프리드리히 슈트루엔제는 코펜하겐 궁정에서 소외되어 있던 덴마크 귀족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이들 중에는 계몽주의의 지지자였던 에네볼트 브란트와 샤크 칼 란차우 백작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란차우 백작은 슈트루엔제를 왕의 주치의로 추천했다.
슈트루엔제는 1770년부터 크리스티안 7세 국왕의 왕비였던 캐롤라인 마틸다의 정부가 되었다. 캐롤라인 마틸다는 처음에는 슈트루엔제를 싫어했지만, 불행한 결혼 생활 속에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슈트루엔제의 재능을 발견하고 점차 가까워져 1770년 봄에는 연인 관계가 되었다. 그의 영향력은 1770년 5월 어린 프레데리크 왕세자의 종두 접종에 성공하면서 더욱 커졌다.[4]
슈트루엔제는 원래 배후에서 궁정을 조종하는 역할을 했으나, 1770년 12월 대신들이 파면되면서 사실상 덴마크-노르웨이의 섭정이 되었다. 그는 크리스티안 7세 국왕의 정신적 무기력 상태를 이용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1770년 12월 10일에는 국무 회의를 폐지하고, 일주일 후 스스로를 'maître des requêtes|마이트르 데 레퀘트프랑스어'(청원 심의관)로 임명하여 모든 부처의 보고가 자신을 거치도록 만들었다. 국왕은 슈트루엔제가 원하는 대로 재가했으며, 이후 슈트루엔제는 모든 부서장을 해고하고 노르웨이 총독직을 폐지하여 내각을 유일한 최고 권위 기구로 만들었다.
15세이던 1752년 8월 5일, 슈트루엔제는 할레 대학교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했고, 1757년 12월 12일 의학 박사 학위를 받으며 졸업했다.[2] 대학 시절 그는 계몽주의 시대의 이상과 사회 및 정치 비판, 개혁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여 무신론을 신봉했으며, 클로드 아드리앵 엘베시우스의 저술과 다른 프랑스 유물론자들을 옹호했다.[2]
1758년, 아버지 아담 슈트루엔제가 알토나의 트리니타티스키르헤(삼위일체 교회) 목사로 부임하면서 가족과 함께 이주했고, 요한 프리드리히도 동행했다. 그는 알토나의 공공 의사로 고용되었으나 급여가 적어 개인 진료를 통해 수입을 보충해야 했다.
1760년, 그의 부모는 렌츠부르크로 이주했고 아버지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총감독관이 되었다. 이때부터 23세의 슈트루엔제는 처음으로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했다. 그의 생활 방식에 대한 기대는 수입과 맞지 않았지만, 뛰어난 지성과 세련된 태도로 곧 상류 사회에서 인기를 얻었으며, 논쟁적인 의견으로 동시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3. 크리스티안 7세의 주치의
슈트루엔제는 1768년 4월 5일에 덴마크 왕실의 주치의로 공식 임명되었으며, 1768년 5월 6일부터 1769년 1월 12일까지 크리스티안 7세 국왕의 해외 순방에 동행했다. 이 순방 기간 동안 그는 서독, 네덜란드, 영국(런던), 프랑스(파리), 하노버 등지의 여러 왕족 및 귀족 궁정을 방문했다. 영국에서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의학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8개월간의 순방 기간 동안 슈트루엔제는 국왕의 깊은 신뢰와 애정을 얻었다. 국왕의 대신이었던 안드레아스 베른스토르프와 재무 장관 하인리히 카를 폰 쉬멜만 등은 슈트루엔제가 국왕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국왕의 돌출 행동이 줄어드는 것을 보고 만족스러워했다. 1769년 1월, 왕실이 코펜하겐으로 돌아오자 슈트루엔제는 국왕의 개인 주치의(시의)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5월에는 명예직인 국가 평의원(etatsråd|에타츠로드da) 칭호가 수여되어 궁정 내에서의 그의 지위가 더욱 높아졌다.
4. 권력 장악
슈트루엔제는 왕세자의 양육에도 깊이 관여해, 장자크 루소의 자연주의 사상에 기반한 계몽주의 교육을 시행했다. 그는 아이를 고립시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고, 추위가 아이에게 유익하다는 루소의 조언을 따라 왕세자가 겨울에도 옷을 거의 입지 않도록 했다.
1770년 5월 5일, 슈트루엔제는 국왕 고문(forelæser|포렐레세르da)과 심의 위원(konferensråd|콘페렌스로트da)으로 임명되었다.[4] 그해 여름, 왕실과 정부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 머무는 동안 국왕 크리스티안 7세의 정신 상태가 악화되면서 슈트루엔제의 권력은 더욱 커졌다. 1770년 9월 15일, 국왕은 당시 외교 정책을 주도하던 요한 하르트비히 에른스트 폰 베른스토르프를 파면시켰다. 이는 슈트루엔제가 본격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16개월간 이어진 이른바 "슈트루엔제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슈트루엔제는 신속히 움직였다. 1770년 12월 10일에는 국무 회의를 폐지했고, 일주일 뒤 스스로를 '청원 심의관'(maître des requêtes|메트르 데 르케트프랑스어)으로 임명했다. 이 직위는 각 부처의 보고를 국왕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는데, 사실상 국왕의 의사 결정 능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슈트루엔제가 국정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는 모든 부서장을 해고하고 노르웨이 부왕직도 폐지했으며, 내각을 국가의 유일한 최고 권위 기구로 만들었다. 1770년 12월 18일부터 1772년 1월 16일까지 약 13개월 동안 슈트루엔제는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하루 평균 3건이 넘는 총 1,069건 이상의 내각 명령을 발부했다.[5] 그의 권력은 1771년 7월 14일, 자신에게 왕실 칙령과 같은 효력을 지닌 내각 명령을 발부할 권한을 부여하는 "비밀 내각 장관"(gehejme kabinetsminister|게헤이메 카비네츠미니스터da)으로 임명되면서 정점에 달했다.
5. 개혁 정책
슈트루엔제는 크리스티안 7세의 이름으로 수많은 계몽주의적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그의 절대 권력은 1770년 12월 18일부터 1772년 1월 16일까지 약 13개월간 지속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하루 평균 3건이 넘는 총 1,069건 이상의 내각 명령을 발부했다.[5] 주요 개혁 내용은 다음과 같다.[6]
그러나 슈트루엔제의 개혁은 여러 비판에 직면했다. 그는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고유한 관습과 전통을 존중하지 않고 추상적인 원칙에 따라 급진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또한 덴마크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하고 모든 정책을 독일어로 수행하여 소통에 문제를 일으켰다. 그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인물들을 기용하기 위해 기존 관료들을 연금이나 보상 없이 대거 해고했으며, 새로 임명된 관리들은 해당 국가에 대한 이해나 경험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 언론 검열 폐지는 오히려 슈트루엔제를 비판하는 수많은 인쇄물의 발행으로 이어졌다.[7] 초기에는 중산층의 지지를 받았으나[8], 국왕을 완전히 무시하는 듯한 태도와 캐롤리네 마틸데 왕비와의 불륜 관계는 왕실에 대한 전통적인 존경심이 강했던 국민들의 반감을 샀다. 특히 1771년 7월 14일, 자신에게 왕실 칙령과 같은 효력을 지닌 내각 명령 발부 권한을 부여하는 'gehejme kabinetsminister|게하임 카비네츠미니스터de'(비밀 내각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이러한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6. 몰락과 처형
슈트루엔제는 교만한 성격을 가졌으며, 의도적으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는 공무원 수를 줄이고 급여를 삭감하면서도, 자신은 호화로운 궁정 유흥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행동은 많은 이들의 반감을 샀다.
그의 개혁 정책은 실패와 강압적인 면이 있었지만, 초기에는 중산층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슈트루엔제 자신은 개혁의 성공 여부나 국민들의 지지에 큰 관심이 없었다. 더욱이 크리스티안 7세 국왕은 정신 건강 문제로 인해 실질적인 국정 수행이 어려운 상태였다.
1771년 7월 14일, 슈트루엔제는 '비밀 관방장관'(gehejme kabinetsminister)으로 임명되었다. 이 직위는 국왕의 친서 없이도 내각의 명령이 국왕의 칙령과 같은 효력을 갖도록 하여, 사실상 국왕을 배제하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는 슈트루엔제가 국왕을 무시한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며 국민적 분노를 키웠다.
또한, 슈트루엔제와 왕비 캐롤라인 마틸다의 공공연한 불륜 관계는 올덴부르크 가문에 대한 존경심이 강했던 덴마크 국민들에게 왕실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여졌다. 1771년 7월 7일 왕비가 공주 루이세 아우구스타를 낳았을 때, 공주가 슈트루엔제의 딸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왕실에 대한 불신과 반감은 더욱 커졌다.
1771년 11월 30일 스스로 백작 작위를 받은 슈트루엔제는 더욱 오만하게 행동했으며, 그의 측근인 에네볼 브란트는 국왕 크리스티안 7세를 조롱하고 심지어 폭행하는 일까지 벌였다. 이러한 전횡과 왕실 모독 행위는 슈트루엔제에 대한 반발을 극대화시켰고, 결국 율리아네 마리 왕태후와 루돌프 크리스토프 에리히 폰 란차우 등이 주도하는 반(反) 슈트루엔제 음모로 이어졌다.
1772년 1월 17일 새벽, 왕립 극장에서 열린 가면 무도회가 끝난 직후, 슈트루엔제와 브란트, 캐롤라인 마틸다 왕비는 크리스티안스보르 성의 각자 침실에서 체포되었다. 주요 체포 혐의는 왕법(Kongelov)을 위반하고 국왕의 권력을 강탈했다는 것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슈트루엔제는 자신을 변호하려 했으나, 왕비 역시 크론보르 성에 죄인으로 수감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왕비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기도 했다. 캐롤라인 마틸다 왕비는 결국 덴마크에서 추방되었다.
1772년 4월 25일, 슈트루엔제와 브란트는 왕권 강탈 등의 죄목으로 오른손이 잘린 뒤 참수형에 처해지고, 시체는 사지가 찢기는 형을 선고받았다. 4월 28일 코펜하겐에서 브란트가 먼저 처형되었고, 이어 슈트루엔제가 처형되었다.
7. 평가와 영향
슈트루엔제가 추진했던 개혁들은 상당 부분 타당성을 인정받았지만, 급진적인 방식과 시기 선택의 문제로 인해 큰 반발에 부딪혔다.[3] 특히 계몽주의 개혁으로 기득권을 잃을 것을 우려한 귀족 세력의 저항이 거셌다.[3] 이러한 반발과 더불어, 왕비 카롤리네 마틸데와의 불륜 스캔들은 당시 사회적 통념상 용납되기 어려웠으며,[3] 이는 그의 몰락과 처형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3] 그의 사후 오랫동안 명예는 회복되지 못했다.[3]
아이러니하게도, 슈트루엔제의 실패와 그에 대한 보수적인 반동은 결과적으로 덴마크 사회에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훗날 개혁이 다시 추진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3]
한편, 불륜 스캔들의 당사자였던 왕비 카롤리네 마틸데는 영국 왕실로부터 외면당하고 독일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3] 이러한 도덕적 비난은 빅토리아 시대까지 이어졌다.[3]
7. 1. 긍정적 평가
슈트루엔제가 시도했던 개혁들은 계몽주의 시대의 사상에 기반한 것으로 평가받는다.[2] 비록 그의 개혁은 시기와 방법상의 문제점, 그리고 개혁으로 인해 기득권을 침해받을 것을 우려한 귀족 세력의 거센 반발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가 추진했던 정책들 자체는 상당 부분 타당성을 인정받는다. 실제로 슈트루엔제가 제안했던 개혁안 중 다수는 그가 사망한 지 수년 후, 특히 1784년의 쿠데타 이후 점진적으로 덴마크 사회에 도입되었다.아이러니하게도, 슈트루엔제의 급진적인 개혁 시도와 그에 따른 보수 세력의 반동은 결과적으로 덴마크 사회에 개혁의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장기적으로는 그의 사후 개혁이 진전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한 측면도 있다는 평가가 있다.
크리스티안 7세 국왕은 슈트루엔제가 처형된 이후에도 그를 개인적으로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슈트루엔제가 처형된 지 3년이 지난 1775년, 크리스티안 7세는 직접 그린 그림에 jeg havde gerne reddet dem begge to|예그 하데 게르네 레데트 뎀 베게 토da("두 사람 모두 구제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글귀를 남기기도 했다.
7. 2. 부정적 평가
슈트루엔제는 오만하고 독선적인 태도로 주변 사람들에게 의도적으로 상처를 주는 언행을 일삼았다.[1][2] 그는 공무원 수를 줄이고 급여를 최저 수준으로 삭감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호화로운 무도회나 가면무도회 등 궁정 유흥에 막대한 비용을 사용했다.[1][2] 또한 크리스티안 7세 국왕을 부추겨 자신과 친구 브란트에게 1인당 6만 릭스달러에 달하는 고가의 의상을 하사하게 하는 등[2] 모순적인 행동으로 비판을 받았다.[1]그의 개혁 정책은 실패와 강압적인 측면이 있었고[1][2], 슈트루엔제 자신은 개혁에 대한 대중의 지지 여부에 무관심했다.[2] 개혁의 방향 자체는 일부 타당했으나 시기와 방법을 그르쳤다는 평가가 있으며[3], 특히 계몽주의 개혁으로 기득권을 잃을 것을 우려한 귀족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3]
국민들의 분노를 키운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슈트루엔제가 정신 질환을 앓고 있던[1] 크리스티안 7세를 완전히 무력화하고 국정을 장악했다는 점이었다.[2] 당시 사람들은 국왕이 심각한 정신 질환이라기보다는 지속적인 학대로 인해 의지가 약해진 상태라고 여겼기 때문에[2] 슈트루엔제에 대한 반감은 더욱 커졌다. 1771년 7월 14일, 슈트루엔제가 '비밀 관방 장관'(gehejme kabinetsminister)으로 임명되어 그의 내각 명령이 국왕의 서명 없이도 왕명과 동등한 효력을 갖게 되자[1][2], 국왕을 무시한다는 인식은 더욱 확산되었다.[2] 심지어 측근인 브란트가 국왕에게 무례하게 행동하자, 슈트루엔세와 왕비의 승인 하에 브란트가 국왕을 감금하고 사과할 때까지 폭행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2]
왕비 카롤리네 마틸데와의 공공연한 불륜 관계 역시 국민적 반감을 샀다.[1][2] 당시 올덴부르크 가문에 대한 존경심이 높았던 상황에서[2], 왕비의 부도덕한 행위는 왕실 전체를 모독하는 것으로 여겨졌다.[1][2] 궁정 내 성적 문란함이 드문 일은 아니었고 국왕 자신도 방탕한 생활을 했음에도[3], 슈트루엔제와 왕비의 관계는 용납될 수 없는 스캔들로 받아들여졌다.[3]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슈트루엔제는 귀족뿐 아니라 일반 민중에게도 혐오와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처형으로 이어졌으며 그의 명예는 오랫동안 회복되지 못했다.[3]
8. 대중문화 속 슈트루엔제
슈트루엔세, 카롤리네 마틸데 왕비, 그리고 크리스티안 7세 국왕 세 사람의 관계는 여러 연극, 소설, 영화, 오페라, 발레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그의 극적인 생애와 계몽주의 사상에 기반한 개혁 시도는 많은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8. 1. 문학
- 1773년: 발타자르 뮌터(Jørgen Hee 번역)의 ''덴마크의 전 총리 슈트루엔세 백작의 개종과 죽음에 대한 충실한 이야기''
- 1935년: 엘제 폰 홀란더-로소의 소설 ''첼레의 포로''
- 1935년: 로베르트 노이만의 소설 ''여왕의 총애자''(Struensee: Doktor, Diktator, Favorit und armer Sünderger; 나중에 ''Der Favorit der Königin'')
- 1948년: 에드가 마스의 소설 ''여왕의 주치의''
- 1953년: 카렌 블릭센의 소설 ''코펜하겐의 밤의 대화''(Samtale om natten i Københavndan)
- 1955년: 제프리 본 블랙스톤의 소설 ''영국 공주이자 덴마크 여왕인 캐롤라인 마틸다''
- 1969년: 노라 로프츠의 역사 소설 ''잃어버린 여왕''
- 1985년: 에드워드 로우리의 드라마 시 ''첼레로부터의 편지''
- 1999년: 페르 올로브 엔퀴스트의 소설 ''왕실 주치의의 방문''(Livläkarens besökswe)
- 2000년: 보딜 스테센-레트의 소설 ''Prinsesse af Blodet - en roman om Caroline Mathildedan''
- 2015년: 다리오 포의 전기 소설 ''덴마크에는 미친 왕이 있다''(C'è un re pazzo in Danimarcaita)
8. 2. 영화
- 영국 영화 The Dictator영어 (1935년)는 슈트루엔세를 둘러싼 드라마를 주제로 하고 있다.
- 로얄 어페어 (2012년)
참조
[1]
서적
Struensees vej til skafottet: fornuft og åbenbaring i Oplysningstiden
Museum Tusculanum Press
2007
[2]
서적
A Revolution of the Mind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0
[3]
논문
"Struensée’s memoir on the Situation of the King" (1772): Christian VII of Denmark
2013
[4]
서적
Danmark-Norges Historie
G.E.C. Gads Forlag
1902
[5]
논문
"Struensee and the Enlightenment," in Commager, The search for a usable past, and other essays in historiography
1967
[6]
서적
Carl Friedrich Cramer. Revolutionär, Professor und Buchhändler
2002
[7]
간행물
Luxdorph's Press Freedom Writings: Before the Fall of Struensee in Early 1770s Denmark-Norway
2002
[8]
웹사이트
Johann Friedrich Struensee
http://www.nndb.com/[...]
2014
[9]
서적
Den afmægtige - En biografi om Christian 7.
Jyllands-Postens Forlag
2008
[10]
문서
Meyerbeer & Letellier
1999-2004
[11]
IMDb
Die Liebe einer Königin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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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ictator
[13]
IMDb
King in Shadow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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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yal Aff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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